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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아시아-태평양 국가지도자들이 보여준 전쟁과 평화의 역사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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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2. 2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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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정치가의 리더십 문제는 국가가 안보외교적 위협에 직면했을 때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런데 정치가의 능력은 조직의 조건과 창의력의 균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직은 계속성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창의력은 당연하게 간주되는 정책적 틀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안보외교적 리더십의 시험은 항상 변화하는 국제정치적 환경을 인식하는 지적 요소와 그 인식적 지식을 국가적 목적에 봉사하게 하는 실천적 요소로 구성된다. 여기서 지적 능력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철학적 이해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역사란 헤겔의 주장처럼 그 자체의 완성을 향해 발전적 운동으로 가정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역사의 발전과정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란 오히려 상황적 맥락에 따라 정치 지도자의 주관적인 목적과 객관적인 제약 사이의 도전과 응전의 세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치지도자들은 역사창조의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다.

정치가는 철학자와는 달리 그의 비전을 실천해야만 한다. 지도자의 안보외교적 실천능력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갖는다. 하나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국제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혁명가의 길이요, 또 하나는 불필요한 전쟁을 방지하면서 안보외교정책을 국제적 변화에 분별력 있게 적응시키는 현상관리자의 길이다. 비스마르크처럼 양자 모두에 해당되는 아주 드문 정치가도 있다. 그가 현상타파적 혁명가일 때 그는 자신의 역사적 비전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했던 철저한 클라우제비츠언이었다. 그러나 그가 독일통일 후 현상관리자로 변신했을 때 그는 러시아에 대해 유화정책을 거듭 채택했다. 그의 유화정책은 체임벌린이 뮌헨협정에서 보여준 겁에 질리고 심약한 유화정책이 아니라 거인이 발휘한 절제력의 미덕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안보외교정책의 리더십은 어떤 특정 독트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당연하게 간주되는 사유의 틀을 극복하고 창의력을 적용시킬 수 있는 지성적 용기에 있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해서 안보외교정책상의 리더십이란 매파적 선동이나 비둘기파의 도덕적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이성적인 정책과 합리적인 전략을 선택하는 부엉이파의 지혜와 용기에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지도자의 바람직한 자질은 자신의 비전이나 정책적 선택을 국내외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지성적 능력과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실천적 용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태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탁월한 리더십은 어느 때 누구에게서 발견될 수 있을까? 20세기 초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전 역사를 통해서 보기 드문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당시 일본의 리더십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신속하게 체득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중(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이른바 3국 간섭은 유럽 강대국들과 대치 속에서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노출시켰다. 이때 처음으로 일본은 국가 간 외교의 중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했다. 3국 간섭으로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계의 다른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전선에서뿐만 아니라 외교의 무대에서 자국의 외교를 향상시켜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한반도와 만주에서 러시아의 정책이 일본의 정책과 양립할 수 없고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했을 때 그들은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러시아에 가담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는 동맹을 구했다. 그리하여 곧 1902년 1월 말 당시 바다의 여왕 영국과 동맹체결에 성공했다. 영일동맹으로 일본은 자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격에 프랑스를 무력화시켜 버렸다.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경계하는 미국의 비군사적 지원이나 독일의 중립선언으로 러시아는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영일동맹체결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한 빛나는 외교적 성취였다.

이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다가올 러시아와의 전쟁에 내포된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1904년 2월 4일 전쟁수행을 결정했을 때부터 긴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일본이 상당한 기간 동안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면 제3의 세력이 중재역할을 해줄 것으로 예상했다. 이토히로부미는 그러한 역할을 해 줄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꼽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루스벨트와 하버드 대학에서 같이 수학한 후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카네코 켄타로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미일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촉진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처럼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전쟁을 종결시키는 문제도 함께 고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은 '전쟁은 수단을 달리한 정책의 연속'이라는 전쟁 철학자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중요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다 나은 평화에 있다는 사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에선 뛰어난 외교력도 군부와의 긴밀한 협조 없이는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당시 일본의 군부는 현명하게도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부의 외무성과 군부 간에 성립된 긴밀한 협력은 전쟁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매우 드문 경우에 속했다. 일본 내에서조차 그 후 이러한 협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근대국가가 탄생한 이래로 문민통제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경우는 외교와 전쟁 두 가지가 한 사람에게 온전히 귀속될 때뿐이다. 우리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 그리고 비스마르크에게서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를 겨우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미국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민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국가의 비군사적 능력과는 상관없이 단지 국가가 처해 있다고 생각되는 위험의 크기에 비례해서 문민통제 대신에 군사적 측면의 독주가 주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 이루어진 문민통제는 그것이 근대국가의 군국주의가 한창 성행하던 때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저하게도 러일전쟁 중의 일본에서는 그러한 군사우선정책이 득세하지 못했다. 군사정책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과 신중한 외교적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군사적인 수단에만 결코 의존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정치적 목적과 함께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포츠머스 평화회담에 참석한 일본지도자들은 이후의 군국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명함, 즉 정치적으로 명료한 인식과 비스마르크의 절제의 지혜를 동시에 겸비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발휘된 고무라 외상의 외교적 수완은 일본의 '사도와(Sadowa)'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였다.

반면 이 시기에 불필요한 전쟁을 예방하고 보수적 분별력의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었다. 그는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미국 제1의 제국주의자였던 루스벨트가 이때에는 마치 독일 통일 후 비스마르크처럼 온건 보수주의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는 러일전쟁 종결 직후 새롭게 등장하는 국제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변신했던 것이다. 당시 점증하는 일본의 해군력으로 인해 필리핀이 미국의 "아킬레스 건"이, 즉 필리핀이 일본의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언자적 인식을 통해 미일 간의 우호적 관계를 확실하게 할 필요성을 자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태프트(Taft) 전쟁장관을 통해 한반도의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면서 필리핀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는 한편, 1908년에는 루트-타카히라 각서(the Root-Takahira Agreement)를 통해 미일 간의 오해나 불신에 따른 충돌의 소지를 제거하는 행동을 취했다. 즉, 루스벨트는 이 각서의 정신에 따라 필리핀에서 미해군의 주요기지 건설계획을 포기하고 하와이의 진주만을 태평양의 주요기지로 개발하는 정책전환을 단행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필리핀이 미국의 아킬레스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리핀에 독립을 주려 했고 불필요한 일본과의 마찰을 선도적으로 제거하려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페리(Perry) 제독과 타운센드 해리스(Townsend Harris) 초대 주일공사가 개척한 미일양국의 우호관계를 손상 없이 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선도적 인식과 재빠른 행동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존속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선도적 대일본 유화정책은 무력감이나 공포에 질려서 나온 우둔한 정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지도자였다. 그는 1907년 거대한 미국의 함대로 하여금 지구를 한 바퀴 돌게 하는 항해의 과정에 일본을 방문하게 함으로써 미국의 유화정책이 오해되지 않도록 가시적으로 일본에 해군력을 과시했다. 20세기 초 루스벨트의 대일본 유화정책은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의 대러시아 유화정책처럼 불필요한 전쟁을 방지하면서 국제적 변화에 분별력 있게 적응하는 현상관리자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 체제를 통해 국제평화를 모색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요컨대 그는 위대한 평화의 화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찰력 있는 정치지도자였다.

이제, 그렇다면 위대한 리더십의 선결요건은 무엇일까? 정치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위대한 리더십은 직관적 이해와 과학적 지식의 조화로 이해될 수 있는 정치적 지혜를 토대로 성립하고 있다. 이것을 국제정치에 적용하여 본다면 우리는 국제적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 수 있다. 즉, 무게와 함께 균형, 구성요소와 구도, 내용과 뉘앙스, 그리고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각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결국 국제관계에서 힘의 균형상태의 변화추세를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미래의 전망에 부응하도록 현실을 재인식할 수 있는 지적능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헨리 키신저는 비스마르크를 '기회는 현재로부터 포착했지만 영감은 미래로부터 이끌어낸' 정치가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정치가는 '장엄한' 인간이지 결코 자신의 목적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우둔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진정한 정치가는 야심에 찬 인간이지만 정치적으로 슬기롭게 숙고한다. 리더십이 정치적 지혜와 지적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디에서 학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공식의 세계가 아니라 예술의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기성품'으로서 지혜나, '일괄 포장된' 지적 능력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간의 정신 속으로 끊임없이 귀의해 봄으로써 그것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중국의 시진핑은 어리석게도 과거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을 넘어 글로벌 중국몽을 실현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와 함께 러시아와 북한의 현상타파의 야심을 드러냈다. 따라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가지도자들에게 참으로 현명하고 겸허한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히 요구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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